법정스님
1932년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삶과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 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3년 함석헌, 장준하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75년 젊은 목숨을 앗아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아 그 해 10월 본래 수행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며
자기다운 질서 속에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명 중심의 세상을 명상하며 홀로 수행 정진하였다.
무소유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시며, 생명 중심의 나눔의 삶을 말씀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스님은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스님은 폐암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며,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을 남긴 뒤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입적(세수 78세, 법랍 55세)했다.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고 당부한 스님은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고,
입적 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