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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1-18

    [매일경제] 연꽃처럼 불길속에서 다시 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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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처럼 불길속에서 다시 피어나길…다 주고 법정스님이 가셨다
송광사서 다비식 열려 … 법정스님 문도들 정부훈장 거절
"스님! 불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참나무 장작 위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자 조계산을 메운 추모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외쳤다. 신자들은 먹먹한 가슴을 달래며 "나무아미타불"과 반야심경을 외우며 극락왕생을 빌었다. 하늘로 타오르던 재들은 비처럼 다시 우수수 떨어졌다.



13일 오전 전남 순천 송광사 경내 조계산 자락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됐다. 스님이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송광사와 조계산에는 1만5000여 명의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이날 오전 10시, 스님의 법구는 안치됐던 문수전을 떠나 108번의 범종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만장도 꽃상여도 없이 평상에 안치된 법구는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삼배를 올린 후 다비장으로 떠났다. 스님 10명이 이운한 법구는 800m 가파른 산길을 올라 오전 11시 다비장에 도착했다. 기다란 행렬을 이루며 조문객들도 험한 비탈길을 올랐다.

스님 법구 위에 참나무 장작이 켜켜이 쌓이자 염송소리도 점차 커지며 산자락을 울렸다.

추모사, 조사도 없었다. 오전 11시 40분 하얀 국화 몇 송이가 장작더미 위로 던져졌다. "법정, 대종사. 불 들어갑니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상좌 스님들이 9개 거화봉으로 불을 붙였다. 참나무를 감싸안은 불꽃은 '탁, 탁' 소리와 함께 이내 법구를 삼켰다. 신자들의 오열에 상좌 스님들도 눈물을 훔쳤다.

5분이 조금 지났을까. 짧은 거화 의식이 끝났다. 상좌인 덕현 스님(길상사 주지)은 "스님을 잘못 모시고 이렇게 보내드려서 죄송하다. 스님은 지금 불길 속에 계시지만 스님의 가르침은 연꽃처럼 불길 속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라며 추모객들과 함께 '화중생연(火中生蓮)'을 외쳤다.

이날 다비식에는 불교계 큰스님들과 중진스님들, 정치인 등도 대거 참석해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한나라당 이계진ㆍ김학송 의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정치인도 다비식을 지켜봤다.

다비식이 끝난 뒤에도 추모객들은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다. 부산에서 온 다향심 씨(법명ㆍ54)는 "법정 스님이 마지막 떠나시는 길도 빈손으로 가시는 걸 보고 '무소유'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됐다"며 눈물을 훔쳤다.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제자 스님들은 사리를 찾지 않았다. 제자 스님들은 14일 오전 10시께 타다 남은 유골을 조심스럽게 수습했다. 전날 다비식은 30여 분 만에 끝났지만 불이 모두 꺼지는 데는 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한줌 재로 남은 유골은 서울 길상사에 4월 중순까지 보관된 후 송광사로 다시 옮겨져 28일 49재를 치른 뒤 뿌려질 예정이다.

한편 법정 스님에게 정부가 훈장을 추서하려 했지만 문도들이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훈장을 받는 것이 법정 스님의 평소 말씀과 유언에 맞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순천 =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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