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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 22-11-18

    [한겨레]불교-대중 ‘소통의 꽃’…불속의 연꽃으로 피다

본문

[법정스님 떠나던 날] 송광사 다비장
“세속인한테 왜…” 눈흘김속 선수련회 시작
“불교 접근 어려워” 한탄에 쉬운 글로 저술
다음달 28일 49재서 뼈 뿌리는 ‘산골’ 진행
13일 오전 10시 전남 순천 송광사 문수전을 나선 법정 스님의 법구가 대웅전 앞마당에서 멈췄다. 그가 평생 따르던 스승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고하기 위해서였다. 조계종을 상징하는 조계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대웅전 앞마당의 지형은 연화지(연꽃이 피는 연못)다. 탑을 세우면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해서 석물 하나 세우지 않았다. 그 연화지 안팎엔 법구를 마지막 배웅하려 새벽부터 몰려든 3만여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많은 스님들도 그의 법구를 에워쌌다.

35년 전 그가 이곳에 왔을 땐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생목숨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풀 길이 없어 그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 그의 주변엔 사복경찰 대여섯명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민주화운동판에서 고군분투하다 내려오는 그에게 산중 노스님들은 “중이 중노릇이나 잘 할 것이지, 무슨 일을 잘못했기에 저렇게 세속 형사들이 산중까지 오느냐”면서 그를 경원했다. 불교계와 대중들의 대표적인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템플스테이를 30년 전 그가 송광사에서 ‘선수련회’란 이름으로 시작할 당시만 해도 “기도나 시키면 될 세속인들을 무엇하러 산사 수련장에까지 출입시키느냐”는 사시 또한 적지 않았다. 세속인들이 ‘불교는 어려워서 접근할 길이 없다’며 한탄할 때 가장 쉬운 문체로 산중불교와 대중들을 소통시켰을 때도 주위엔 “중이 무슨 글이냐”는 핀잔이 팽배했다. 그는 ‘전통’으로 무장한 무관심, 무지와 싸우는 불교계의 이단아였고,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강요된 반인권을 용납할 수 없어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시대의 반항아였다. 세상 사람들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도시로 향할 때 반대로 산속 오두막으로 숨어들었던 은자였다.

그의 법구 주위엔 큰스님이라면 으레 따르던 만장 하나, 연꽃 상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단아였다. 그는 불교를 아파했고, 소유와 욕망의 시대를 아파했다. 그는 말년 폐암으로 고생했다. 석가모니 당시 최고의 법력을 자랑했던 유마거사가 몸져눕자 석가모니가 문수보살을 시켜 병문안을 한다. 문수보살이 “어찌 거사같은 분이 아플 수가 있느냐”고 묻자, 유마거사는 말한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조계산 언덕에 마련된 다비장에선 1만5천여명이 따라와 서로 사진을 찍겠다고 자리다툼을 하며 소란했다. 1980년대 조계산 천자암에서 불일암을 오가며 법정 스님이 헌남비에 끓여준 국수를 먹곤 했던 선승 법웅 스님은 다비장을 오르며 “법정 스님이 장례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폐 끼치지 말고 그대로 태우라는 것은 허언이 아니라 평소 살던 삶 그대로를 말한 것”이라며 “그 깐깐한 성정에 여기까지 와서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다비장에서 벌떡 일어서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작불에 불이 붙었다. 법정 스님의 상좌인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이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고 외쳤다. 유마거사는 “불꽃(욕망) 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내야, 마침내 시들지 않는다”고 했다. 법구에 불꽃이 휩싸이자 “스님, 스님 뜨거워요, 어서 나오세요”라는 보살(여성불자)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지만 시대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간 이단아는 불꽃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송광사 쪽은 밤을 새워 꼬박 하루 동안 다비를 마친 뒤 14일 오전 습골(뼈를 수거하는 것) 의식을 치르고 그의 유골을 송광사 지장전으로 옮겼다. 법정 스님의 유골은 다음달 28일 송광사에서 열리는 49재에서 비공개로 산골이 진행될 예정이다.

 

 

 


송광사/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