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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 22-11-18

    [조선일보] 법정스님이 남긴 책 물려받은 40년전 신문배달 소년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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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남긴 책 물려받은 40년전 신문배달 소년 강씨

  • 권승준 기자 virtu@chosun.com

▲ 31일 오후 길상사에서 덕진스님이 강모씨에게 법정스님이 입적하시기 전 읽으셨던 머리맡의 책을 전달했다.. 법정스님은 유언에서 40여년전 봉은사에 있을때 법정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했던 소년에게 머리맡의 책을 주라고 하셨다.법정스님이 생전에 머리맡에 두었던 책은 '월든(데이빗소로우)', '칼릴지브란의 예언자','벽암록','선학의 황금시대',생텍쥐베리의 위대한모색', '선시' 등 6권이다./ 조선일보
“길상사가 원하면 조건없이 기증할 것”
40여년 전 법정스님에게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했던 ‘소년’ 강모(49)씨는 어느새 중년이 돼 있었다. 강씨는 법정스님의 삼재가 열린 31일 길상사에서 덕진스님을 만나 법정스님이 남긴 ‘머리맡의 책’을 전달받았다.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은 유언장에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남겼다. 1971년 쓴 ‘미리쓰는 유서’에 쓴 글을 그대로 유언장에 남긴 것이다. 법정스님은 ‘미리쓰는 유서’에서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고 썼다.
강씨는 법정스님이 입적한 뒤 유언장 내용을 접하고도 처음에는 자신이 그 ‘신문을 배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강씨가 봉은사에서 살았다는 것을 안 봉은사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와 덕진스님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강씨는 현재 봉은사에 공양을 드리는 불교신자다.

덕진스님은 강씨를 만난 뒤 “강씨가 기억하는 스님의 모습이 우리가 가까이서 뵌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며 “강씨가 스님이 가리킨 그 ‘신문배달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덕진스님을 만나 그 때 시절을 회상하다보니 법정스님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 씩 생생하게 살아났다”고 말했다. 강씨는 초등학생이던 1970년 공양주였던 어머니를 따라 3년 넘게 서울 봉은사에 살았다. 당시 절에 살던 유일한 초등학생이었다. 강씨는 “법정스님은 강직하고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분이었다”면서도 “개구장이라 장난도 많이 쳤는데 그런 나를 예뻐해주셨다”고 회상했다.

강씨에 따르면 법정스님은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승복을 벗지 않았고, 공양을 드릴 때는 조금이라도 계율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참회 불공을 드렸다. 일반 신도들을 처소에 들이지도 않았다. 강씨는 “스님은 신도들과 거리를 두셨지만 어렸던 나는 자유롭게 스님 처소에 드나들도록 허락해 주셨다”고 말했다. 덕분에 강씨는 아침저녁으로 법정스님에게 신문과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법정스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다.

“스님께서 제게 그림공부를 하라며 24가지 색이 들어있는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사주신 적이 있었어요. 당시 같은 반 친구들은 8가지나 15가지 크레파스를 주로 썼던 시절이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것을 받고 너무 기뻤는데 나중에 누가 훔쳐가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강씨는 자연을 즐겼던 스님의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봉은사에 연꽃이 피는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근 약수터에서 물을 마구 퍼가고 연못의 진흙을 헤쳐놓는 바람에 연꽃이 더이상 피지 않게 되자 무척 안타까워 하셨어요. 사람들이 연못에 가지 못하게 막으시고 손수 연못을 가꾸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연꽃이 핀 것을 바라보시며 제게 ‘연꽃이 피는 이유를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고 선문답 같은 말씀을 남기기도 하셨지요.”

스님이 강씨에게 남긴 책은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 ‘선시(禪詩)’, ‘선학(禪學)의 황금시대’, ‘벽암록(碧巖錄)’, ‘생텍쥐베리의 위대한 모색’,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등 6권이다. 모두 출간된지 20∼30년씩은 된 책들로 스님의 손때가 타 책장들이 누렇게 바래있었다.

강씨는 처음 책을 받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책을 받으러 오는 날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스님께서 어떤 뜻으로 내게 책을 남기셨는지, 그리고 내가 그 뜻을 제대로 받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덕진스님은 “불교에는 ‘시은(施恩)’이라는 게 있다. 시주의 은혜라는 말인데 법정스님은 아무리 조그만 시은이라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불자의 태도를 몸소 실천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당시 스님께 신문을 배달해 드리면 ‘고맙다’고 꼭 말씀하시곤 했다. 의례 하는 말씀인줄 알았는데 그 것도 빚이라 생각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스님이 물려주신 이 책들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천천히 읽어본 후 스님께서 남기신 ‘무소유(無所有)’의 뜻에 따라 길상사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덕진스님은 “앞으로 법정스님의 기념관을 길상사에 세울 계획”이라며 “책을 기증받는다면 그 곳에 비치할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