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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1-18

    [레이디경향] 사촌 동생에게 전한 서간에서 법정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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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에게 전한 서간에서 법정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다

레이디경향 | 입력 2011.06.09 16:08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후 벌써 1년이 훌쩍 흘렀다. 세상에 말빚을 지지 않겠다며 더 이상 책을 펴내지 말라는 말씀을 남긴 진정한 무소유의 정신을 남긴 채였다. 그런 스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그의 사촌 동생인 수광 박성직 선생이 세상에 꼭 나누고 싶다며 펴낸 책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청년 '제철(법정 스님의 출가 전 속명)'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시대의 어른이 남긴 청년 시절의 기록



법정 스님처럼 종교를 막론하고 '시대의 어른'으로 불리는 분도 드물 것이다. 그가 남긴 '무소유'의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바래기는커녕 물질만능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로 남아 있다. "무언가를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라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스님의 입적 후 1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촌 동생 수광 박성직(71) 선생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법정 스님이 청년 시절에 남긴 편지글 모음을 통해서다. 스님이 출가한 1955년부터 시작된 편지는 그로부터 15년, 수광 선생이 장성해 청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거의 반세기가 훌쩍 지나 그 편지는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스님,평생을 걸쳐 써오신 주옥같은 글들도 모두 말빚이므로 거두어들이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이렇게 청개구리 짓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아직 살아 계시다면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꾸짖으시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제게 주신 스님의 육필을 모아 이렇게 책으로 엮는 뜻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중략)스님 내면에 이토록 다감하고 따뜻한 면들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일 뿐입니다.그리고 스님의 소중한 편지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마음하는 아우야!」의 저자 서문 중에서 인터뷰 장소로 택한 길상사는 법정 스님과 수광 선생, 두 사람에게 남다른 곳이다. 알려진 것처럼 법정 스님이 창건한 절이기도 하고, 대중법회로 많은 이들과 만나던 곳이기도 하며, 마지막 가신 길이기도 하다. 수광 선생도 사촌 동생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신도로 법문을 듣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다. 미소를 지으며 법정 스님과의 일화를 추억하던 선생의 눈가가 가끔 젖어들던 것도 그 때문일 터다. 다시 찾은 길상사에서는 유난히 수광 선생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스님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리라.



"스님 살아생전에는 사촌 지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법회를 오가다 길목에서 마주쳐도 그저 몇 마디 안부만 여쭈었으니까요. 인척들에게는 엄하고 소원한 분이셨지요. 처음에는 많이 섭섭했지만 어르신 입장을 잘 아니까 거리를 두고 지냈지요. 우리도 그게 편했어요.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나서 알아보시는데, 이런 데 서툴뿐더러 인터뷰에도 나서고 싶지 않았어요. 기왕에 책이 나왔으니 최소한으로 하려고요(웃음)."

사실 말이 '사촌 동생'이지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스님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선생의 집에서 자란 탓이다. 한방을 썼지만 일곱 살이란 나이 차 때문에 큰형님처럼 모시고 지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 수광 선생의 집안에서도 누군가를 대학에 보낸다는 건 보통 큰 결심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전남대학교 상과대에 진학한 법정 스님은 온 집안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장남과도 같았다. 그런 스님의 출가 결심은 가족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 역시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출가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다. 당시 수광 선생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크게만 보이던 형의 결심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도 언제나 속이 깊던 형이었기에 출가의 길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성직아세상 일이 한바탕의 꿈이라더니 꼭 꿈속 같기만 하다.나는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렸다.출가한 나로서는 어떤 연유에서일지라도 집안에 대해서는 배반이 아닐 수 없다. (1956년) 스님이 남긴 유산을 이어받아

법정 스님의 깔끔하고 강직한 성미는 타고난 것인지, 수광 선생과 한방을 쓰던 시절에도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당시에 매우 귀하던 종이책과 신문을 책장 두 칸에 나누어 정리해놓고 누가 손만 대어도 귀신같이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출가 후 이어지는 편지에도 책을 부쳐달라거나 어떤 책을 어떻게 포장해서 누구에게 보내라는 식의 세세한 언급이 종종 나온다. 그만큼 책을 사랑했고 주변에도 많이 권하는 편이었다. 한창 방황하던 10대의 사촌 동생에게 스님은 항상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나 책과 함께하던 조용한 형은 출가한 후에 도리어 명랑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먼 날에 죽어버렸거니 생각하여라. 편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안 하는 것이 좋다"는 스님의 매정한 말에 마음 아파하던 동생은 상실감을 안은 채 형이 남긴 책을 자주 뒤적이는 나날을 보냈다.

"유달형의 「인생노트」란 수필집을 유독 권하셨지요. 제 또래는 독서량이 많지 않을 텐데 저는 형을 본받아서인지 지금도 책을 즐겨 보고 정리 정돈도 잘합니다. 물론 형님처럼 머리가 비상하지 않아서 당시 읽은 책들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 좋다. 크리스챤!사람은 종교적인 생활을 가져야 할 것이다.거기에서 생활의 정화가 올 것이기에. (중략)아무것도 신앙하지 않는 것보다는 얼마나 장한 일이냐.한 가지 명심할 것은 (중략) 아무런 비판 정신도 없는 맹목적인 신앙은 인간 성장에 오히려 큰 해독을 끼칠 우려성이 없지도 않는 것이다. (1958년)


사실 수광 선생은 오랜 동안 '가짜 불자'로 살아왔다고 털어놓는다. 남들처럼 중·고등학교 무렵에는 교회에도 나가봤고 계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법정 스님은 이런 동생에게 한 번도 불교를 강권한 적이 없다고 한다.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선생의 부부 내외와 자녀들은 모두 불자지만 여동생은 천주교, 남동생은 기독교, 막내 동생은 불교… 이런 식으로 집안에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도 평화롭다. 종교의 공존이란 무릇 이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것도 스님이 남긴 훌륭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광 선생 부부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1986년에 불일암에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은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세례와 비슷한 의식이다.

"당시에 받은 제 불명이 수광(壽光)입니다. 이미 출가한 지 오래인데 온 식구를 불러서 재워주시고 계를 주셨으니 그것으로 충분해요. 한 분이 출가해서 도를 깨치면 그 빛이 몇 대까지 미친다는 말처럼 저희 형제들 모두 잘 살고 있어요.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보다도 마음에서요. 명절 때 모이면 '밥술이라도 먹고 사는 건 다 스님 덕'이라고 입을 모으죠."

'늘 진실하라'던 당신의 말을 새기고너에게 형으로서 유산을- 생활신조를 주고 싶다.'진실하라'는 것이다. (중략)결코 거짓된 것과 비굴에 타협하지 말아라.가령 연애에도 진실이 아니면 그건 죄악이다.무슨 일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하여라. (1959년) 스님은 평생을 대중과 불교의 소통을 염원하며 학자나 고승들만 읽었던 한자 경전을 요즘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매진했다. 평생 그렇게나 좋아하던 책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더 이상 새 책을 만나볼 수가 없는 「무소유」, 「텅 빈 충만」,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 등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쉬운 문장이지만 그 안에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아름다운 글들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쓰인 편지를 통해서도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를 여읜 애통과 장례 일로 네 수고가 많을 줄 믿는다.이제는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가사도 보살펴드려야 할 것이다. (중략)나는 오늘부터 아버지의 명복을 불전에 빌기로 작심했다. (중략)나는 겨울 안거가 지나야만 출타를 할 수 있으므로 봄에 찾아볼까 한다.당장에 가 뵐 수 없음이 진심으로 죄스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1970년, 마지막 편지) 불가에 매인 몸으로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면 가족들의 대소사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광 선생은 스님의 어머니(큰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스님을 대신해 20여 년간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선생의 친어머니는 향년 91세를 맞으셨다. 그야말로 두 어머니를 모시고 산 격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큰어머니를 잘 따랐어요. 성격이 무척 온화해서 당최 다투는 법이 없으세요. 제가 두세 살일 때부터 스님은 우리하고 살고 어머니는 따로 사셨으니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가 모셨지요."

그리고 작년, 스님은 폐암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고 위중하다는 소식에 수광 선생 부부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자리에 누운 스님은 의사 표현을 하기 힘든 상태였다. "성직입니다" 한마디에 손을 꼭 한 번, "공덕림(부인의 법명)도 왔습니다" 한마디에 또 한 번. 스님은 힘주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입적하셨다. 당신의 어머니를 평생 모신 동생에 대한 빚은 아마 평생토록 마음에 간직했을 것이다.

"평생 고이 간직해온 편지들입니다. 사실 더 많은 편지가 있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글만 추렸어요. 저희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이라 나누고 싶었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며 인사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스님의 생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저희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군대에서 휴가 나온 청년 성직이 해인사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 함께 찍은 사진도 시선을 끈다. 출가 후 7년 만에 처음 만나는 터라 다른 길을 걷는 형제 사이에는 어색한 기운마저 흐르지만, 친형제라고 해도 될 만큼 닮았다. 삶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점에서도 다를 바가 없다. "다음 생에 더 착한 아우가 되어 다시 만나고 싶다"는 선생의 바람이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 분이 출가해서 도를 깨치면 그 빛이 몇 대까지 미친다는 말처럼 저희 형제들 모두 잘 살고 있어요. '밥술이라도 먹고 사는 건 다 스님 덕'이라고 입을 모으죠"

"평생 고이 간직해온 편지들입니다. 사실 더 많은 편지가 있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글만 추렸어요. 저희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이라 나누고 싶었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며 인사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스님의 생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저희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게 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제공 / 원상희, 출판사 녹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