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스님의 입적 15주기를 맞아 사상과 삶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사)맑고 향기롭게가 10월 19일 오후 2시 서울 길상사 설법전에서 개최한 이번 세미나에서는 무소유의 철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기조연설에 나선 이계진 아나운서(맑고 향기롭게 전 이사)는 법정스님과 40년 가까운 인연을 회고하며 "스님을 안 뒤에 저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이 낳아서 길러주시고 교육시켰지만, 사람으로서의 삶의 도리는 스님의 법문과 책이 저에게 스승이었다"며 법정스님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증언했다.
이 아나운서는 이번 학술세미나의 의미에 대해 "법정 스님을 어렴풋이 얘기할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 정말 연구되고 분석되고 종합해서 학술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법정 스님의 사상이 어떤 것이었고 가르침이 진정 어떤 것이었는가를 조명하는 출발점에 선 것"이라며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20년 전 로마 교황청에서 목격한 포콜라레(Focolare) 운동 사례를 언급하며 "'맑고향기롭게 운동'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폐해진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한 평신도의 사랑의 실천이 세계적인 운동이 된 것처럼, 오늘 세미나가 앞으로 그런 운동까지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스님의 책을 함께 읽는 조그마한 모임을 이끌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과 교훈은 대단하다"며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모으고 조직화 한다면 스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을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펼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안했다.
이날 개회식에서 덕조스님(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길상사 주지)은 인사말을 통해 "법정 스님의 사상과 삶을 조명하는 이 자리는 무소유의 철학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함께 논의하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덕조스님은 "은사이신 법정스님은 선승(禪僧)인 동시에 문인(文人)이셨으며, 맑고 절제된 문장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사색의 거울이 되고 있다"며 "이번 학술 세미나는 스님의 삶과 사상이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이어져 갈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년에는 법정스님 학술상을 제정할 계획”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조계총림 송광사 주지 무자스님은 성북구사찰연합회장 원경스님이 대독한 축사에서 "스님께서 남기신 '무소유'의 가르침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채움 속에서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위대한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소욕지족, 즉 적게 원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풍요이자 해탈임을 스님은 온몸으로 증명하셨다"며 "오늘날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마음의 허기를 느끼며 정신적 길잡이를 갈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해인 수녀는 덕인행 신도가 대독한 축시를 통해 "생전의 스님은 우리에게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해 주신 암자의 멋진 사서이셨고, 일상의 평범한 소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며 지식보다는 지혜를 강조하는 수련장이고 선인이셨다"며 법정스님과의 추억을 시로 풀어냈다.
기념촬영후 진행된 학술세미나 제1부에서는 법정스님의 사상적 뿌리와 현대적 의미가 집중 조명됐다. 김재성 능인대학원대 교수는 '법정스님의 사상과 초기불교'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법정 스님의 사상은 초기불교의 명료한 지혜를 뿌리로 삼고, 대승불교의 따뜻한 자비를 줄기로 삼아, 선불교의 생생한 실천으로 꽃을 피운 거대한 나무와 같다"고 평가했다.
김재성 교수의 발표는 법정스님의 사상이 어느 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의 다양한 전통을 아우르며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잊혀 가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하도록 안내한 법정스님의 역할을 재조명함으로써, 스님의 가르침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를 넘어 현실적 삶의 지침이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어 인경스님(명상상담 평생교육원 원장)이 '법정스님의 <무소유>, 고집멸도에 기반한 마음치유적 이해'를 주제로 발표했다. 인경스님은 "<무소유>의 핵심된 메시지는 '소유하지 말라'는 권유나 '마음비움'의 미학이 아니라, 삶의 진짜 모습을 똑바로 '바로 보라'는 깊은 통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경스님 발표는 <무소유>가 단순한 수필 문학을 넘어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원리에 기반한 실질적인 명상 지침서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현대인의 고통을 '너무 많이 가지는 소유'로 진단하고, 원인을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파악한 법정스님의 통찰은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대한 명확한 처방전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제2부에서는 법정스님 사상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과 사회적 실천이 다뤄졌다.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상담학과 교수는 '법정스님 수행관의 심리치료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하며 법정스님이 <무소유>에서 언급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문 교수의 발표는 법정스님의 수행관을 현대 심리학의 언어로 재해석함으로써 종교와 비종교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치유의 길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무소유, 절제, 자비와 같은 수행 요소가 개인의 회복탄력성, 정서 안정, 삶의 만족도 및 대인관계 향상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법정스님의 가르침이 일상생활, 상담, 웰빙, 생태적 삶 등 현대인의 다양한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태동 박사(불교신문 기자)는 '법정스님의 민주화 운동과 전개과정'을 주제로 법정스님의 사회참여 이력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여 박사는 1955년 출가 이후 해인사 시절부터 황산덕 교수, 장준하 선생 등 민주인사들과 교류하며 형성된 세계관이 1960~70년대 유신체제 반대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밝혔다.
이 발표는 그동안 수행자이자 문인으로만 주로 알려진 법정스님의 사회참여 활동을 학문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특히 1975년 불일암 입산 이후에도 <서있는 사람들> 등의 저서를 통해 사회 부조리를 성토하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낸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김동수 열사 같은 민주화 인물 배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법정스님이 산중에 머물면서도 사회와 단절되지 않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했음을 확인시켰다. 나아가 '맑고 향기롭게' 시민운동의 주창과 길상사 창건을 통한 실천적 불교시민운동의 전개는, 법정스님의 민주화 활동이 단순한 정치적 저항을 넘어 불교혁신운동, 민중불교운동, 참여불교운동을 아우르는 포괄적 사회민주화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세미나에는 원로의원 동명스님, 보성 대원사 주지 현장스님, 성북구사찰연합회장 원경스님, 박청수 원불교교무 등 사부대중 400여 명이 참석했다. 김호성 동국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재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부교수, 백형찬 전 서울예대 교수, 신진욱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백경임 동국대 명예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이 단순한 물질적 비움을 넘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실천 가능한 지혜이자,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적 가르침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초기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현대 심리치료까지, 산중 수행에서 민주화 운동까지, 법정스님의 삶과 사상은 종교와 세속, 수행과 참여,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며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입적 15주기를 맞아 재조명된 법정스님의 삶과 사상은 물질만능주의와 불안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진정한 행복이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피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 속에 있다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묻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