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다비식
추모객 1만5000여명 순천 송광사 숲에서… 간소한 절차로 장례사리도 찾지 않아
"불길 속에서 연꽃이 피어납니다. 화, 중, 생, 연(火中生蓮)!"
지난 11일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이 불꽃 속에서 금생(今生)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오전 전남 순천 송광사 경내 조계산 자락에서 엄수됐다. 스님의 유지대로 군더더기 없는 간소한 예식이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모인 추모객 1만5000여명은 다비장 주변 계곡을 가득 메우며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법정 스님의 법구(法軀)는 이날 오전 10시 전날 밤을 보낸 송광사 문수전을 나섰다. 경내에는 범종(梵鐘)이 108번 은은히 울려 퍼졌다. 스님은 길상사에서 송광사로 올 때처럼 대나무 평상 위에 가사만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위패와 영정을 앞세운 스님의 법구는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다비장으로 향했다. 길 양쪽의 추모객들은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
법정 스님의 뜻대로 그의 마지막 길엔 '없는 것'이 많았다. '임종게(臨終偈·스님들이 입적 전에 짓는 게송)'도, 연꽃이 장식된 커다란 관(棺)도, 울긋불긋한 만장(輓章)도, 각계 인사들의 추모사도 없었다. 번거로운 형식 없이 절을 떠났듯 다비식 역시 간소했다. 다비장은 송광사에서 2㎞ 정도 떨어진 산중이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룬 가운데 다비장 주변만 정리돼 있었다. 장식은 일절 없이 장작더미만 쌓여 있었다.
오전 11시 10분쯤 스님의 법구가 다비장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추모객과 법구를 따라온 신자들의 "나무아미타불" 염송 소리는 더욱 커졌다. 법정 스님의 법구는 장작더미 사이에 모셔졌고 그 위로 참나무 장작이 겹겹이 쌓였다. 오전 11시 40분쯤 어른 키 정도로 장작이 높아지자 흰 국화 몇 송이가 장작더미 위로 던져졌고, 이어 상좌 스님 등이 불을 붙였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은 일제히 "스님,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불꽃은 이내 장작더미를 삼켰다. 신도들의 "나무아미타불" 염송은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상좌 스님들도 눈물을 훔쳤다.
불길이 활활 피어오르자 12시 10분쯤 반야심경 염송을 마지막으로 다비식은 끝났다. 하지만 많은 추모객들은 계곡에 그대로 남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었다. 법정 스님의 상좌인 덕현 스님(길상사 주지)은 추모객들에게 "스님은 가셨지만 불길 속에서 스님의 남기신 참뜻은 연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대중들과 함께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고 외쳤다.
법정 스님의 상좌들과 100여명의 불자(佛子)들은 밤을 꼬박 새워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법구(法軀)를 감싼 불길을 지켰다. 22시간이 지난 14일 오전 10시 다비장에선 아직 사위지 않은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구덩이 주변으로 스님 20여명이 둘러섰고, 삼귀의례(三歸依禮)와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습골(拾骨)의식이 시작됐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가파르고 미끄러운 산길을 다시 올라온 500여명의 불자들이 함께했다. 김선영(45·대전 유성구)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는 저 불꽃처럼 스님의 큰 뜻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습골의식은 이날 오후 1시쯤에야 마무리됐다.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아 큰 유골부터 우선 수습한 뒤 나머지를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은 "스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최소한의 절차에 따라 다비의식을 치렀고, 사리도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무상자에 담긴 법정 스님의 유골은 14일 밤 서울 길상사로 옮겨졌다.
법정 스님의 유골은 49재까지 길상사에 안치된 뒤 지난 1975년 이후 거처였던 송광사 불일암과 강원도 오두막에 각각 산골(散骨)될 예정이다. 49재는 입적 7일째인 초재부터 6주 뒤인 육재까지는 길상사에서, 7주째인 막재(4월 28일)는 송광사에서 열린다. 송광사와 길상사에 마련된 분향소는 49재 기간에 운영된다. 21일에는 길상사에서 추모법회가 열릴 예정이다. 순천=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조홍복 기자 powerbo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