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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참 어른’ 법정 스님이 남긴 이야기들 | |||||||||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한 세상 살다가 78세를 일기로 지난 3월 11일 입적하셨다. 스님은 말 한 마디, 글 한 문장에서 잘못된 시대를 꾸짖고 세상 번뇌를 위로했다. 법정 스님의 큰 가르침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은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님은 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을 통해 경험한 인간의 존재에 고민하다가 1955년 출가를 결심한다. “한핏줄, 이웃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미쳐 날뛰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워 묻고 또 물으면서 고뇌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를 타고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지인의 소개로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났다.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의 얼굴을 살펴보고 생년월일을 묻더니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머리를 깎았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나가 종로통을 한 바퀴 돌았다.” 이후 효봉 선사의 거처인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하루에 나무 두 짐씩 해다가 아궁이마다 군불을 지피며 힘겨운 행자시절을 보냈다. 법정 스님은 이듬해 7월 보름,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사미계를 받은 후 선사를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옮겼다. “나는 이 시절을 두고두고 감사한다. 무슨 일에나 처음 먹은 마음과 시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겪어 터득할 수 있었다. 그때 여럿 속에 섞여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럭저럭 지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돌이켜보면 아찔해진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가 4·19혁명과 5·16혁명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법정 스님은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불교 종단에서는 이런 나를 마치 무슨 보균자처럼 취급했다. 기관원이 절에 상주하다시피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가서 괴롭혔다. 군사독재의 당사자들에게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는다.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가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1975년 10월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산으로 돌아갔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 스님은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펴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법정 스님이 펼친 유일한 대중과의 소통은 길상사에서 열린 정기 법문뿐이었다. 길상사는 1996년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씨(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창건했다. 법정 스님은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법정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 상태가 악화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의식이 또렷하게 유지될 때면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내가 산중에서 사는 일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홀로 살았으나 언제나 함께였다 법정 스님은 평생 출가수행자였다. 스님의 삶을 통해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스님은 한 번도 종단 행정을 보거나 사찰의 소임을 사지 않고 홀로 조용하게 살다 간 것이다. 다른 성직자들이 높은 직책을 임명받거나 사회,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면 법정 스님은 올곧고 순수한 인격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드러나길 싫어해 깊은 산속에서 숨어서 지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스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점점 크게 만들었다. 법정 스님은 비단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과 비유로 불교 교리를 삶의 철학으로 전파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스님의 책은 늘 베스트셀러였다. 1976년 출간된 「무소유」는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 산문집이다. 법정 스님은 다른 종교와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다.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홀로 산속에 살았지만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을 추모하며 영원히 기억한다. 법정 스님이 남긴 어록 용서와 사랑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신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용서는 저쪽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굳게 닫힌 이쪽의 마음의 문도 활짝 열게 합니다. -2004년 길상사 봄 정기 법회에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